글로벌 콘텐츠기업들과의 경쟁이 시작되면서 이제 K-콘텐츠는 ‘슈퍼 IP’를 목표로 하기 시작했다. 방송 포맷 분야에서도 이미 <복면가왕>이나 <더 비트박스> 같은 성공 IP가 등장했다. K-포맷이 더 큰 결실을 맺고, 지속적으로 성공을 이어가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사진 제공 | 썸씽스페셜
필자가 3년째 맡고 있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의 방송 포맷 관련 수업의 첫 시간을 여는 고정 멘트가 있다. “BTS의 음악을 듣는 사람들 만큼, 영화 <기생충>과 <오징어게임>을 본 사람들 만큼이나 많은 전 세계인이 소비하는 한국 콘텐츠가 있다. 바로 (여러 나라 버전의) <복면가왕>이다.”
아직도 이 사실을 모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이 안타까워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까닭도 있지만, 말할 때마다 ‘국뽕에 차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수업에 임하는 초롱초롱한 눈빛에 대고 ‘그대들이 <복면가왕> 같은 성공의 다음 주인공이 되길!’ 하는 주문같이 여겨지기를 바라는 까닭이기도 하다.
<복면가왕> 사진 제공 | MBC
‘슈퍼 포맷’은 꿈이 아니라 목표
<복면가왕>처럼 성공한 방송 포맷이 한국에서 또 탄생하는 것이 아직도 허황된 꿈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최근 몇 년만 살펴보더라도 자사 채널에 편성되기도 전에 해외 판매의 쾌거를 이룬 포맷은 의외로 많다. SBS 포맷티스트의 나 이탈리아, 노르웨이, 스웨덴 등 9개국에 포맷을 판매한 것으로 알려진 MBC, 웨이브의 <피의 게임>, (코로나로 포맷의 구매와 제작이 다소 정체됐던 기간 중에도) 판매 지역을 동유럽, 남미 등으로 점점 넓혀갔던 CJ E&M의 <너의 목소리가 보여>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기존/신규 비드라마(non-scripted) 포맷이 많은 방송 사업자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해외 진출이 시도되고, 소기의 성과가 이루어지는 것을 직접 보고 체감하는 입장에서 이제 슈퍼 포맷에 대한 꿈은 현실적인 목표가 되어가고 있다.
<피의 게임> 사진 제공 | 웨이브
2020년 설립된 포맷 전문 독립 사업자인 썸씽스페셜에서도 최근, 한국 독립 포맷 사업자 최초로 아이디어의 형태만으로 해외 진출에 성공한 사례가 탄생했다. 2023년 초 네덜란드 RTL4에서 성공리에 제작/방영된 <더 비트박스(The Beatbox)>가 바로 그것이다. 이 성공 사례를 통해 다음의 글로벌 슈퍼 포맷이 한국에서 다시 탄생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들이 수반되어야 할지 짚어보고자 한다.
글로벌 감수성, 시장의 차이와 변화에 예민해질 것
<더 비트박스>는 2020년 한국콘텐츠진흥원의 ‘방송포맷랩 지원사업’이 그 토대가 되었다. 해외 진출을 목표로 하는 비드라마 포맷의 창작과 교육을 위한 랩을 운영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업인데, 썸씽스페셜도 2020년부터 3년간 운영사로 선발되어 참여해왔고 이 과정에서 많은 오리지널 페이퍼 포맷들이 탄생했다. 썸씽스페셜이 추구했던 운영 방식은 일방적인 강의를 통한 교육이 아닌 (주로 프리랜서 작가들로 이루어진) 창작팀과 해외 파트너십 1:1 매칭을 통한 ‘코칭’이다. 이를 통해 한국의 창작자들의 강점은 더 부각시키고, 부족한 부분은 해외 공동 개발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체화시키기 위함이었다. ‘글로벌 성공 포맷의 공식’ 운운하며 우리의 노련한 창작자들을 교육하기에는 한국 창작력은 이미 다방면으로 검증되었기 때문에 창작자들이 섣부른 판단으로 “이런 아이디어가 해외에서는 통할 것이다.”라는 생각은 지양하고, 가장 자신 있는 장르나 아이템에 집중해주기를 요청한 것이다.
<더 비트박스> 사진 제공 | 썸씽스페셜
다만 여기에, 한국의 포맷 창작/개발 환경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부분이 있기에 좀더 예민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다. 그 중 가장 처음 대두된 것은 ‘감수성’이다. 이는 수년 전부터 글로벌한 무대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다양성과 포용성’과 관련된 것으로 우리나라 콘텐츠 제작에서 종종 가볍게 다뤄지던 부분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해외와의 제작 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포맷 개발의 개념과 깊이의 차이다. 서구권의 경우 한국에서는 대개 제작 단계에 가서야 결정하게 되는 연출적인 측면을 미리 예측하는 것까지를 개발로 간주하는 것이 우리와는 차별되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경 쓴 것은 방송사, OTT 등 다양한 플랫폼을 대상으로 하는 패키징을 염두에 둔 개발 방식이다. 예를 들어 트레일러, 피치덱, 나아가 파일럿 제작까지 미리 생각하고 개발을 하는 방식은 아직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외 파트너들을 통해 배울 것이 많았다.
우리는 감수성과 포맷 개발의 개념과 깊이 차이 인식, 그리고 개발 방식의 변화만 탑재한다면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문구가 현실이 된다고 믿었고, 그 믿음이 아직은 걸음마 단계지만 조금씩 성공 사례로 이어지고 있다.
네덜란드 지상파 채널 RTL 4를 통해 방영된 <더 비트박스> 사진 제공 | 썸씽스페셜
포맷은 씨앗, IP 비즈니스가 있어야 나무가 된다
이제 ‘좋은 포맷 IP’는 ‘좋은 아이디어’이기만 해서는 부족하다. 어떤 기발한 아이디어를 지닌 소수의 천재성에 의존하는 비즈니스가 전혀 아니라는 뜻이다. 기존의 슈퍼 포맷이 사전 기획 단계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을 줄임으로써 정확하게 같은 모습으로, 최대한 많은 나라들을 여행 다니는 단순 라이선싱에 집중했다면, 지금의 포맷 IP는 지속 가능하고 유연한 비즈니스 사이클, IP 확장에 대한 다양한 솔루션, 확장된 IP를 관리하는 시스템과 결합되어야만 가치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는 포맷의 창작과 개발, 판매와 확장, 자산화와 보호로 이어지는 여러 단의 전문가들의 노력이 포맷이라는 IP를 중심으로 수렴되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더 비트박스>의 경우, ‘프리멘틀 네덜란드(Fremantle Netherland)’와 공동 개발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협업의 극초기부터 독립 에피소드 형식의 ‘음악 쇼’를 창작하기로 결정함과 동시에 (포맷의 특성상) 어느 지역부터 진출할지, 어떤 플랫폼에의 판매는 지양할지에 대한 협의를 지속적으로 진행해 나갔다. 따라서 엄밀히 네덜란드 진출은 성과라기보다 더 큰 시장(ex: 영미권)으로의 효율적인 진출을 위한 전략의 실행에 가까웠던 것이다.
세계 시장 경험이 풍부한 프리멘틀이라는 파트너를 통해 우리는 포맷 IP를 국제적인 단위로 성공시킴에 있어 ‘좋은 아이디어 자체’ 만큼이나 필수적인 요소가 무엇인지도 배울 수 있었다. 첫 번째 요소는 아이디어를 발탁할 때부터 비즈니스적인 선택을 한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개발과 병행해서 상표권 확보 등의 IP 보호 장치를 마련한다는 점이다. 마지막은 <더 비트박스> 전담 플라잉 프로듀서를 배정하는 등 제작 현장에서부터 빠트림 없이 이루어지는 자산화를 들 수 있다.
<배틀인더박스> 사진 제공 | MBN
포맷 해외 진출의 경험, 그리고 경험의 확산
<더 비트박스>의 창작자인 장정희, 구범석 작가(<너목보> 창작 작가진이기도 하다)를 금년 초 RTL 4에서의 방영을 앞두고 네덜란드 첫 녹화 현장에 모시고 갔을 때 들었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두 분은 <더 보이스 코리아>의 작가진이기도 했는데) “<더 보이스 코리아>에 참여했을 때, 언젠가는 우리도 우리 아이디어로 네덜란드에 진출할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꿈을 꿨는데 이런 날이 오다니 정말 감개무량하고, 더 열심히 창작해야겠다는 의욕이 생긴다.”
한국에서의 포맷 해외 진출과 경험은 그간 방송사나 대기업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썸씽스페셜의 <더 비트박스> 사례와 더불어, 최근 영국 UK TV에 편성되어 2024년 상반기 제작/방영을 앞두고 있는 ㈜앤미디어의 <배틀인더박스(Battle in the Box)>(2021년 MBN 방송)도 눈여겨 볼만하다. 이 역시 한국콘텐츠진흥원 제작지원사업의 수혜를 입은 작품이자, 방송사가 아닌 독립 제작사에서 창작하고, 온전히 IP를 소유하고 있는 비드라마 작품이 최초로 해외에 진출한 기념비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영국을 대표하는 코미디언인 지미 카(Jimmy Carr)가 진행을 맡게 됐다는 소식까지 알려지면서 십여 개국으로부터 포맷 구매 문의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이렇듯 크고 작은 경험들을 통해 다음의 창작에 동기를 부여받고 해외 진출의 꿈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실행하게 되는 경험의 층이 방송사를 넘어 독립 제작사, 그리고 프리랜서 작가들에게까지 퍼져 나가고 있다. 이런 변화는 방송사의 니즈에 따라 제작/방영된 포맷들 중 방송사의 선택에 따라 해외 판매가 이루어졌던 기존의 포맷 해외 진출의 경로를 벗어난다. 포맷을 창작하는 다양한 당사자들이 포맷 탄생의 뿌리에서부터 탄탄하게 글로벌 진출의 자양분을 뿌릴 수 있다는 점에서 결국 포맷 비즈니스의 파이를 키우는 일이 되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유의미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1개의 슈퍼 포맷보다 10개의 다양한 성공 포맷을
그렇다면 누군가 “한국에서 반드시 글로벌 슈퍼 포맷이 탄생해야만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나는 “꼭 그렇지는 않다.”라고 말하고 싶다. 한국을 진정한 포맷 강국, 즉 전 세계가 지속적으로 ‘새롭고 특별한 아이디어’를 찾고자 되돌아오게끔 만들기 위해서는 다양한 비즈니스 모델을 지닌, 다양한 스케일과 장르의 포맷 10개의 성공 사례가 있는 것이 1개의 슈퍼 포맷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이미 한국은, 한국에 앞서 짧은 부흥기를 누리고 퇴장했던 다른 포맷 강국들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으므로, 슈퍼 포맷의 탄생은 물론 오래도록 전 세계 콘텐츠 업계가 즐겨 찾는 ‘포맷 맛집’이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